Array ( [0] => [include(틀:독일 국방군/장성급 장교)] ---- ||<-2><tablewidth=400><tablealign=right><tablebordercolor=#666><colbgcolor=#666><colcolor=#fff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5px 10px;" '''{{{+1 헤닝 폰 트레슈코프}}}[br]Henning von Tresckow'''}}} 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425px-Bundesarchiv_Bild_146-1976-130-53,_Henning_v._Tresckow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본명''' ||'''헤르만 헤닝 카를 로베르트 폰 트레슈코프'''[* [[국립국어원]]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'폰트레슈코프'로 표기한다. [[게르만어]]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.][br]Hermann Henning Karl Robert von Tresckow || ||<|2> '''출생''' ||[[1901년]] [[1월 10일]] || ||[[프로이센 왕국]] [[마그데부르크]][br](現 [[독일]] [[작센안할트]] 주 마그데부르크) || ||<|2> '''사망''' ||[[1944년]] [[7월 21일]] (향년 43세) || ||[[나치 독일]] 점령하 [[폴란드]] || || '''복무''' ||[[독일 육군(나치 독일)|나치 독일 육군]] || || '''최종 계급''' ||[[소장(계급)|소장]] || || '''주요 참전''' ||[[제1차 세계 대전]][br][[프랑스 침공]] || || '''주요 활동''' ||[[발키리 작전]] || || '''주요 서훈''' ||철십자 훈장 2등급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||<tablewidth=400><tablealign=center>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3782170716060334g.jpg|width=100%]]}}} || || [[대령]] 시절의 모습 || > '''[[히틀러]]는 [[수피즘|춤추는]] [[이슬람]] [[탁발]]승이다. 그를 제거해야 한다.''' >---- > - 헤닝 폰 트레슈코프 [[독일 제국]], [[나치 독일]]의 군인.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의 주요 인물. == 생애 == [[아돌프 히틀러]]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인물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이듯 트레슈코프 또한 프로이센의 브란덴부르크에서 태어난 귀족가문의 자제였다. 아버지는 [[빌헬름 1세]]의 대관식에도 참여한 프로이센 육군 [[기병]] 장군이었으며, 어머니는 프로이센 교육부서의 관료였다.그의 아내는 [[독일 제국군]]의 육군 보병대장이었던 [[에리히 폰 팔켄하인]]의 딸이었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에는 [[마른 전투#s-3|2차 마른 전투(Battle of the Marne)]]에서 ~~독일은 패배했지만~~ 공훈을 인정받아 [[철십자 훈장#s-5.1.3|2등급 철십자 훈장]]을 수여받았다. 이후 육군을 잠시 떠났다가 [[파울 폰 힌덴부르크|힌덴부르크]] 원수의 추천으로 다시 복귀하였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에는 A집단군의 [[게르트 폰 룬트슈테트|룬트슈테트]] (당시)상급대장과 [[에리히 폰 만슈타인|만슈타인]] 중장의 참모장교로 배속받아 [[낫질 작전]] 입안 및 건의, 실행 등을 보좌하였다. 만슈타인 장군의 낫질 작전이 육군최고사령부(OKH)에 의해서 거절되었지만 트레슈코프가 세계 1차대전 시절 9보병연대 동료였던 [[루돌프 슈문트]] 대령이 히틀러의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레슈코프가 직접 슈문트에게 작계 내용을 전달하여서 ~~지휘체계를 무시하고 ~~히틀러에게 보고될 수 있었고 [[에리히 폰 만슈타인#s-2.3|결국 승인을 받게 될 수 있었다.]] 1941~1943년 동안 [[바르바로사 작전]]에 투입되어 중부집단군 사령관 [[페도어 폰 보크|보크]][* 트레슈코프는 보크의 조카였다.] 육군 원수(이후 [[귄터 폰 클루게|클루게]] 육군 원수로 교체됨)의 참모진에 배속되었다. 나중에는 [[우크라이나]]의 [[드니프로 강|드네프르 강]]의 수비를 맡는 육군 제442[[척탄병]][[연대(군대)|연대]][[연대장|장]]으로 발령받았고 1943년에 육군 제2[[군단]]의 [[참모장]]으로 근무하였다. ==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 == 트레슈코프는 원래 [[베르사유 조약]]을 점점 파기해 나가던 나치당을 열렬히 지지하였다. 하지만 [[장검의 밤]], [[베르너 폰 블롬베르크#s-4.1|블롬베르크-프리치 사건]] 등을 목도하면서 점차 나치당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. 이를 알아챈 [[에르빈 폰 비츨레벤]]은 트레슈코프가 군대에서 퇴직하려는 것을 말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의 일원으로 초대하였다. 특히나 유대인 대량 학살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히틀러로부터 완전히 마음이 돌아섰으며 당시 중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[[페도어 폰 보크|보크]]에게 중부집단군이 반 히틀러 운동을 주도하자고 권하기도 하였다. 보크 또한 유대인 대량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적 학살 및 관련 명령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. 중부집단군의 참모진들이 트레슈코프를 중심으로 대부분이 반 히틀러 성향을 보이게 되면서 에르빈 폰 비츨레벤, [[프리드리히 울브리히트]] 장군 등의 베를린에 있었던 인물들과 결탁하게 되고 이후의 쿠데타 및 암살작전에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주도적인 작전기지가 된다. 대부분이 검은 오케스트라의 멤버이기도 하였다. 동부전선 중부집단군의 [[페도어 폰 보크|보크]], [[귄터 폰 클루게|클루게]] 두 사령관들이 완전한 친-히틀러 성향도 아니고 반-히틀러 성향의 성향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을 항상 견지했기 때문에 트레슈코프 이하의 중부집단군 소속 지휘부 장교들이 히틀러 암살과 관련된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.[* 만슈타인도 마찬가지로 히틀러 암살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. 모두 반 히틀러 세력의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는 대신에 그 사실을 SS나 게슈타포에 알리지는 않았다.] 물론 두 사령관들의 성향 때문에 [[아돌프 히틀러|히틀러]]의 의심을 강하게 받기는 했고 클루게는 의심을 받은 끝에 베를린 소환 직전 자살한다. 이후 트레슈코프와 올브리히트 장군이 이끄는 중부집단군의 반 히틀러 성향의 장교들이 불꽃 작전(Operation Spark)이라는 이름 아래에 무수한 히틀러 암살 시도를 주관하였다. 특히 트레슈코프 본인도 [[작전명 발키리]]에서 나오는 것처럼 [[코앵트로]]로 위장한 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바 있다. 히틀러가 중부집단군을 시찰 차 방문하였을 때, 트레슈코프는 베를린으로 복귀하는 비행기에 히틀러와 동승하는 중령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친구인 [[헬무트 스티프]][*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은 아니었지만 반 나치 성향의 인물이었다. 나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.] 소장에게 줄 것이라고 속인 뒤 코앵트로 두 박스로 위장된 폭탄을 건네 준다. 하지만 기폭제는 작동했지만 폭탄이 폭발하지 않았고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그 중령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암살시도가 걸리지 않도록 회수하고자 하는데 애를 먹는다.[* 직전명 발키리에서도 "총통이 금주가인데 술 가지고 있는거 걸리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"라고 압박하여 간신히 회수한다.] 트레슈코프와 올브리히트 장군의 여러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었고 이 때문에 히틀러는 늑대굴과 자신의 별장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고 그 외부로 나가야 할 때는 더더욱 불규칙적인 동선으로 움직였다. 따라서 나중에 본격적인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 때는 늑대굴에 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|슈타우펜베르크]] 대령이 직접 폭탄을 가져다 두는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. 이때의 실패 이후에 2군단의 참모장이 되었기 때문에 히틀러 암살계획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없게 되었다. 자신의 동료였었던 [[루돌프 슈문트]]가 여전히 히틀러의 군사 참모였기 때문에 그에게 히틀러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부서 신설에 대해서 건의하였으나 슈문트는 트레슈코프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였던 터라 실패하였다. 이 밖에도 [[아돌프 호이징거]][* 나중에 전후 [[독일 연방군]]의 재창설, 재무장에 기여하고 연방군의 첫번째 대장에 오른다. 호이징거와 함께 연방군의 대장이 되는 인물이 마찬가지로 독일 국방군 출신인 [[한스 슈파이델]] 장군이다.][* 그리고 호이징거 장군은 후에 암살 시도에 휘말려 경상을 입는다. 폭탄 바로 앞에 있던 브란트 대령과 달리 본인에겐 다행히도 책상의 다리가 폭탄을 어느정도 막아준 덕택에 살았다.] 장군에게도 부탁했으나 같은 이유로 실패하였다. 이후 부상으로 예비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배속받은 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|슈타우펜베르크]] 대령을 만나게 되면서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을 준비하게 되고 트레슈코프는 [[발키리 작전]]을 수정하여 히틀러 사망 이후의 베를린 장악 작전을 구상한다. 하지만 늑대굴에서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고[* 늑대굴에서의 폭탄 암살시도로 히틀러는 경상을 입었다. 하지만 트레슈코프를 옛날에 도와줬던 슈문트 장군이 중상을 입고 사망한다.] 2군단으로 돌아가있었던 트레슈코프는 주둔지였던 폴란드 비아위스토크(Białystok)의 한 마을에서 관용차 [[운전병]]과 [[전속부관]]만 대동한 채 숲으로 들어가 [[수류탄]]으로 자살한다. == [[전쟁 범죄]] == 아이러니하게도 그 또한 전쟁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인물이다. 그는 제2군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던 1944년에 [[알프레트 로젠베르크]]가 입안한 폴란드 청소년 [[유괴]] 계획인 건초 작전(Heuaktion)의 세부 사항을 직접 실행하고 감독했다. 그가 유괴한 5만 명의 아이들은 10세에서 14세 전후의 나이였으며, 독일화 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독일 영내로 보내져 융커스 사 공장에서 [[강제노동]]에 종사하였다. 심지어 일부는 [[아우슈비츠 수용소]]로 보내져 살해당하기도 했다. ==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== [[영화]] [[작전명 발키리]]에선 [[케네스 브래너]]가 맡았다. [[군복]] 고증이 완벽에 가까운 영화이니만큼, [[장군]]들이 잘 입지 않던 M40 [[전투복]]에 장군용 부착물을 단 모습 등을 완벽하게 재현했다. [[게임]] [[Hearts of Iron IV]]의 나치승리 대체역사모드인 [[The New Order: Last Days of Europe]]에서는 독일을 민주화시키려는 개혁파의 주축 4인방중 한명으로, 독일군의 군제개혁을 주도적으로 맡는다. 만약 슈페어가 4인방의 숙청을 진행한다면 폭탄테러를 일으켜 본인은 사망하고 슈페어는 이름 모를 부하의 희생으로 죽지는 않고 중상을 입는다. [[대체역사소설]]인 [[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]]의 주인공인 디트리히 샤흐트의 조력자로 등장하며 원 역사와는 다르게 히틀러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. 또한, 폴란드 해방 작전에서 공을 세워 원수가 된 [[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]]와 함께 그의 참모장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, 내전의 피해를 최소화한 점을 인정받아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다. [[분류:독일의 귀족]][[분류:독일 국방군/인물]][[분류:제1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1901년 출생]][[분류:1944년 사망]][[분류:독일의 자살한 인물]][[분류:폭발물에 죽은 인물]][[분류:마그데부르크 출신 인물]] [include(틀:포크됨2, title=헤닝 폰 트레슈코프, d=2023-12-26 11:49:16)] ) 1